진노 타카시 「후쿠시마에서 세계로~타츠고야마의 위인 아사카와 칸이치의 걸음~」이 투고되었습니다. 이는 2018년 10월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립 타츠코야마의 텐쇼지에서 열린 사후 70주년 기념 강연회 진노 강연 및 타츠코야마 초등학교장 스즈키(鈴木)喜助의 전기가 바탕이 되었습니다.
「후쿠시마에서 세계로~타츠고야마의 위인 아사카와 칸이치의 걸음~」 진노 타카시 (와세다 대학)
자료 : 아사카와 칸이치의 타츠고야마 시대(타츠고야마 초등학교장 스즈키(鈴木)喜助 『아사카와 칸이치』에서)
아버지・아사카와 마사즈미에 대하여
아사카와 마사즈미는 1844년(弘化元年) 9월 12일, 니혼마츠성의 북쪽 鉄砲谷 저택에서 宗形家의 아들로 태어난다. 아명을 小彌太, 후에 宗形幸八郎昌武라 칭하였다. 10세 무렵부터 같은 번의 小野派 일도류 사범인 日夏孫兵衛에 대해 검술을 배우고, 또 니혼마츠의 수학관에서 한학과 무술 수련을 실시한다. 1857년(安政4年)에 아버지와 함께 번의 에도 저택에 가고, 에도에서는 유생 田次郎八에 대해 한학을 배운다. 그 후 분큐 원년 정월부터 二本松藩 포술 사범 아사카와照清에게 포술을 배운다.
아사카와 가문은 대대로 니혼마츠 번사로서 번주 丹羽侯를 섬기고 二本松의 집안 저택인 郭内鉄砲谷의 저택에 살았다. 아사카와照清는 같은 번의 高木権太夫의 누나 야소와 결혼해 八太夫를 보았다. 照清의 아들 照成는 田口藩 번사 松浦竹之進의 장녀 우타를 맞아들여, 가독을 상속받아 장녀 이쿠, 차녀 기미가 태어난다. 그러나 照成는 텐구당의 난(天狗党の乱)으로 전사하고, 우타는 미망인이 된다.
무진전쟁이 일어나자, 아사카와가의 당주인 照清도 방위대 일원으로 출진하여 1868년(慶応4年) 7월 29일 니혼마츠 낙성(落城)의 날 大手門 앞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9월 23일에 아이즈 와카마츠(会津若松)도 개성(開城)해 전란은 가라앉지만, 니혼마츠 사람들에게 고난이 닥친 것은 그로부터이다. 전쟁 중 서군에게 짓밟혀 논밭은 황폐해지고 오곡은 익지 않으며 혼란을 틈타 도적은 밤낮없이 횡행했다. 역적의 무리(賊徒)라는 오명 아래 토벌된 사족(士族)들의 전후(戦後) 피로곤비(疲労困憊)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고, 가택지, 보물은 소실되거나 약탈당했다. 번적을 봉환했기 때문에 봉록은 받지 못하고 그날의 식량도 없는 구렁텅이 생활이 된다. 아사카와 가문은 照清, 照成 모두 전사해 일가의 기둥(柱石)을 잃고, 저택도 전화로 모조리 불타 없어지고, 우타와 두 딸, 시어머니 야소는 고난의 몇 달을 견딘다.
아사카와(朝川) 일가는 우타가 이를 떠받쳤다. 낮에는 바느질 스승이 되고 밤에는 이웃집에서 바느질과 빨래, 빨래 등을 도맡아 근소한 임금을 받아 겨우 생계를 이어왔는데, 그에 동정한 집안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宗形가문의 둘째 아들 幸八郎昌武를 사위 양자로 맞아들인 것이 메이지 2년 9월의 일이었다. 昌武는 아사카와가에 들어가 사위한 뒤 이름을 功으로 고치고, 일가를 짊어지게 된다. 가록은 정지되고 저축은 없고 정직도 없다. 당장 낮에는 수습 스승이 되어 인근 자제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어두컴컴한 등불 아래서 우산을 쓰고 부업에 힘썼다. 아사카와는 어두울 때부터 밤늦게까지 일심불란하게 일했다. 그러나 한 가족의 생계를 지탱하기에 충분한 임금은 얻을 수 없었다. 그 무렵 장남 칸이치(貫一)가 태어났다. 功으로 개명한 昌武는 다시 이름을 마사즈미(正澄)로 고치고, 초등학교 교원 지원서를 제출하여, 메이지 7년 7월, 다테군(伊達郡) 타츠고야마 소학교(立子山小学校)에 부임하였다.
니혼마츠에서 타츠고야마로
타츠고야마는 전국 시대 이후 가모(蒲生), 우에스기(上杉), 혼다 마사나가(本多政長)의 영지가 되는 등의 변천은 있었지만, 양잠업이 번성하고 생사, 羽二重를 낳는 관계로 막부령이 되어 대관소의 지배하에 놓였다. 이른바 천령(天領)이라 직접 통어되는 일이 적고 공조부역(貢租賦役)도 느슨하여 노는 이도 많았으며 풍기는 문란하고 도박은 유행하며 검소 근면의 미풍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메이지 유신 시기, 촌민의 생계는 곤란해져 마을은 피폐해져 있었다. 마을 주민 중에는 논밭 산림을 전당포하고 조상 전래 택지 건물을 남의 손에 넘기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이 타츠고야마(立子山)에 왜 마사즈미(正澄)가 교원으로서 부임하게 되었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아사쿠라 테츠조(朝倉鉄蔵 후쿠시마 현회 의장을 맡은 후에 중의원 의원)의 다음과 같은 술회가 있다.
「나의 아버지, 테츠지로(鉄次郎)는 농업의 한편 지방의 산물인 생고치의 전매 알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치 판매를 위해, 니혼마츠의 제사 회사인 双松館에 출입해, 佐野利八 전 사장이나 山田修 등과 친분이 있었다. 마을에 소학교를 개설하게 되었을 때 마을의 장래를 생각하고 마을 개량을 도모하려면 인심의 교화가 선결 문제이다. 그러려면 우량한 교원을 뽑아야 하지만 마을 안에는 적임자가 없다. 예로부터 학문이 왕성했던 니혼마츠에는 학덕이 높은 옛 번사가 많이 계실 터이니 한 가지 의논해 보자 하여 친분이 있던 山田옹에게 그 추천을 부탁하였다. 사정을 들은 옹은 잠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 거기에는 아사카와 마사스미 군이 최적임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친하게 지내고 있지만 동군(同君)은 요즘 옛 번사로 한학의 소양도 깊고 인격도 고결하여 나무랄 데 없는 분이다."라고 말했다. 본인을 만나 마을 사정을 이야기하고 희망 여부를 물었다. 山田옹의 말대로 훌륭한 인격자였기 때문에 마을로 돌아가 상의하고 일동의 찬성을 얻은 후 절차를 밟아 우리 마을에 초빙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사즈미(正澄)는 다치코야마(立子山)에 부임하게 된다. 마사즈미가 부임한 1874년(메이지 7년) 무렵, 철도는 물론 없고, 도로도 차마(車馬)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일가(一家)는 당분간 필요한 가재도구를 휴대해, 침구는 인부에게 짊어지게 해 니혼마츠에서 시부카와(渋川), 시모카와사키(下川崎)로 나와 아부쿠마 천(阿武隈川)을 건너, 니시이노(西飯野)에서 산길을 오르내려 15킬로를 도보로 걸어 타츠고야마(立子山)에 입성했다.
타츠고야마(立子山)에서의 생활
다츠고야마 소학교(立子山小学校) 연혁지에는 「메이지 7년 8월 7일, 삼등 수업생(三等授業生)·아사카와 마사즈미(朝河正澄) 착임하다, 월급 4엔」이라고 쓰여 있다. 전년 12월 태어난 칸이치(貫一)는, 생후 불과 200여일 만에 다츠고야마으로 옮겨 살았다. 한여름 땡볕을 받으며 칸이치를 등에 업고 동행한 우타의 노고는 얼마나 됐을까. 마을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주었지만, 일가(一家)가 가교실(仮教室)로 정해진 大平山 텐쇼지(天正寺) (조동종(曹洞宗))에 이르렀을 때만 해도 우타의 몸은 솜털처럼 지쳐 있었다.
하지만, 일가(一家)는 주지 스님 가족이 지내는 공간(庫裡)의 한 방을 임시 거처(仮寓)의 장소로 제공받아, 마을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대우를 받는다. 주지(住職)인 円海스님도 여러가지로 잘 챙겨주었다. 결국 마사즈미(正澄)는 1903년 10월 29일까지 30년 동안, 마을 교육의 중심이 되어, 영달을 바라지 않고 평범하게 지내면서도 비범한 세월을 마을에서 보냈다. 마을을 개량한 것이 마사즈미이며, 다츠고야마 촌(立子山村)은 마사즈미의 노력으로 1910년 2월 25일, 우량 마을(優良村)로 내무대신(内務大臣)으로부터 표창을 받기에 이른다.
다츠코야마 소학교의 창설은, 메이지 7년 7월 25일로, 처음에는 학생수가 적어, 텐쇼지(天正寺) 객전(客殿) 밖에 있는 방 52평 반(52坪半)을 빌려 임시 교실로 삼았다. 아사카와(朝河) 일가에게는 주지 스님 가족이 지내는 공간(庫裡)의 한 방의 한 방을 제공했다. 마사즈미는 박학다식, 능필가(能筆家), 무예(武芸)의 달인으로, 무사의 예절을 지키며 항상 하오리 하카마(羽織袴)를 착용하고 단좌하여 외모를 무너뜨리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아사카와 텐진(朝河天神)」이라 불렸다. 그리고 마을의 실상(実情), 마을의 습속(習俗)도 알게 되었고, 마사즈미는 친절하고 공손히(懇切丁寧) 교육지도를 맡았기 때문에 평판이 좋았다. 게다가, 그동안 이 마을에는, 마땅한 바느질 선생(お針の師匠)이 없어 애를 먹고 있었기 때문에, 재봉(裁縫)에 능통한 우타가 왔으므로 마을 처녀들은 크게 기뻐했고, 농한기에는 바느질 하는 처자(針子)가 실내에 넘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우타의 호평도 마사즈미보다 나으면 낫지 못하지 않았다. 우타는 마을 여성들의 중심축이 되어 재봉을 가르쳤으며, 특히 연말연시 농한기에는 매우 바빴다. 그래서인지 쇠약해져 죽고 만다. 우타의 시신은 니혼마츠(二本松)의 신교지(真行寺)에 묻혔다. 그 후, 아이들은 니혼마쓰에서 온 할머니 야소(ヤソ)가 길러서 어머니를 잃은 후 몇 년을 보냈는데, 학교용 담당(学校用係)인 阿部善次郎가 다테군(伊達郡) 야나가와마치(梁川町)의 텐진사(天神社) 신관(神官) 関根備의 여동생 에히(ヱヒ)를 후처로 소개하였다.
타츠고야마 소학교는 개교 당시, 100명이 채 안 되는 학생 수였다. 円海스님과 둘이서 수업을 맡았다. 이듬해인 메이지 8년에는 재적 학생 수가 187명으로 늘어나고, 성적 우수자를 수업생(授業生)이라고 하여 돕게 하자, 텐쇼지(天正寺)의 객전(客殿)으로는 좁아졌다. 촌민들의 헌금을 모아 메이지 8년, 마을 중앙 字竹 아래 19번지에 교사(校舎)를 신축하였다. 지조개정(地租改正)으로 반대자도 있어, 경비 조달이 어려워져 공사가 중단되었으나, 이듬해 7월에 개교식이 거행되었다. 남쪽으로 향한(南面した) 교장실에는 하오리 하카마(羽織袴)로 위의를 바로잡은 마사즈미가 있었다. 북쪽으로 접한 곳(北隣)에 주택이 있어, 칸이치(貫一)는 다섯 살 여름 때부터 초등학교 시절, 중학교 시절, 와세다 시대도, 메이지 28년(1895년)에 도미(渡米)할 때까지 약 22년간, 이곳을 면학과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다.
마사즈미의 교육
마사즈미는 교육에서는 문부성 편찬의 단어편(単語篇), 연어편(連語篇), 소학독본(小学読本), 수신훈(修身訓)을 가르쳤는데, 가르치는 정신은 문명 개화의 그것이 아니라, 일찍이 배운 유교사상(儒教思想), 무사도정신(武士道精神)이었다. 또 교수방법도 상급생이 하급생의 학습을 봐주고, 졸업생 중 성적 우수자를 뽑아 조교로 만드는 정도였다. 마사즈미가 가장 서투른 것은, 주산(珠算)과 양법 산술(洋法算術)이었다. 학생들에게 매우 친절했기 때문에 학부형(父兄)의 신뢰도 높아졌다. 타츠코야마에는 취학하지 않는 사람이 상당했는데, 개교 당시 60여 명이었던 것이, 1년 후, 메이지 8년 12월에는 학생(生徒)수, 남 95명, 여 39명, 합계 134명이 되었고, 메이지 10년 12월에는 남 125명, 여 67명, 합계 192명이 되었으며, 메이지 13년에는 남 128명, 여 99명, 합계 249명이 된다. 메이지 12년 9월, 마사즈미는 6등 훈도보(六等訓導補)가 됐고 월급도 10엔이 된다. 후처 에히(ヱヒ)도 마을 사람들과 친하게 교제하고 재봉을 잘했기 때문에 바느질 하는 처자(針子)도 방을 가득 채웠다.
소년 칸이치(貫一)에 대한 교육
에히(ヱヒ)는 칸이치(貫一)에게 책을 읽게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손을 쥐어 쓰게 했다. 안에서는 지능을 연마시키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 산에 오르게하고, 낚시를 권해서 몸을 단련시켰다. 칸이치는 선천적으로(生来) 허약했지만 몸도 튼튼해진다. 일찍부터 가정교육을 받은 칸이치는 대여섯 살에 이미 그 지능은, 여덟 아홉 살 아이 이상으로 앞서 있었다. 5세 3개월로, 아직 학령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메이지 12년 4월 타츠코야마 소학교에 입학한다. 하오리 하카마(羽織袴)를 착용하고 있었다. 하나를 듣고 열을 아는 아이였다. 메이지 15년 보통소학교(普通小学校)를 졸업하고, 메이지 18년 중등소학교(中等小学校)를 졸업했으며, 메이지 20년 고등소학교(高等小学校)를 졸업했다. 8, 9세 때 13, 14세 아동을 능가하여, 칸이치는 어느 시험에서도 으뜸이었고, 진급식에는 학생 대표(生徒総代)로 우수상을 받았다. 가와마타(川俣)나 이노(飯野)에서 실시된 비교시험(比較試験)에서는, 칸이치가 타츠고야마교(立子山校)를 대표해서 나가, 항상 최우수였기 때문에 「2대 아사카와 텐진(二代目朝河天神)」으로 불렸다. 메이지 18년 4월의 소학교의 중등 제1급 졸업에 즈음하여 11세 4개월의 칸이치는, 후쿠시마현으로부터 학력 우등에 붙어서, 일등상으로 호주머니 벼룻집(懐中硯箱) 한 개를 받았다.
마사즈미는 칸이치에게 책읽기 지도를 할 뿐만 아니라 타츠고야마에 남아 있는 전설과 니혼마츠의 지리연혁, 무진(戊辰)의 전란, 니혼마츠 소년대(二本松少年隊)의 분전, 낙성(落城)의 상황, 그 후의 고난을 들려주어, 장래에는 학자로서 세상에 나오도록 가르쳤다. 백모(伯母) 야에(八重)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코리야마(郡山)의 안도(安藤)가(家)에서 태어난 안도(安藤)祐助, 즉 후의 아사카 곤사이(安積艮斉)가 학문을 좋아하여 에도(江戸)에 올라가 각고의 노력을 하여 쇼헤이코(昌平黌)의 유관(儒官)이 되어 천하의 제일유(第一儒)로 추칭되게 된 경위(次第)를 상세히 들려주었다. 칸이치의 백모 야에는, 니혼마츠 신사의 신관 安藤重宣의 아내로, 이 安藤重宣는 郡山安積国造神社의 신관(神官)인 安藤親重의 손자였다. 큰 숙부(大叔父) 祐助는 아버지 親重와 함께 어린 시절을 니혼마츠에서 보냈다. 祐助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藩儒에 대해 한문 서적(漢籍)을 배운다. 에도에 나가 사토 잇사이(佐藤一斉)의 문(門)으로 들어가 대성하여, 쇼헤이코(昌平黌)의 유관(儒官)이 된다. 安積艮斉는 그 호(号)이다. 艮斉는 사학(史学)에 정통했다. 칸이치는 백모 야에로부터도 艮斎의 사람됨을 듣고, 또한 중학교에서 艮斎의 생가를 드나들며 칸이치의 향학심(向学心)에 박차를 가하였다.
타츠고야마(立子山) 텐쇼지(天正寺)의 벽화
벽화는 칸이치가 출생 후, 다섯 살 여름까지 임시 거처한 텐쇼지(天正寺) 본당 정면의 하얀 벽에 낙서한 거칠게 달리는 말(奔馬)의 그림이다. 초봄의 화창한 날에 円海스님이 유명한 나무(名木)인 남천(南天)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칸이치는, 노승이 손질을 마치고 사다리를 본당 오른쪽 옆 백벽에 치웠을 때, 아버지 책상 위에서 작은 벼루(矢立)를 꺼내들곤, 붓도 쥐지 않고 크고 작은 여섯 마리의 거칠게 달리는 말(奔馬)이 머리를 흔들며 경쟁하는 광경을 그린다. 그것은 천진난만하고 웅혼한, 다섯 살짜리 아이가 썼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훌륭한 필치였다. 그렸다고 시끄럽게 떠드는 칸이치에게 円海스님은 놀란다. 그러나 円海스님은, 이 낙서는 계속 이대로 두라고 했기 때문에 그대로 남았다.
소학교 동급생이 말하는 칸이치(貫一)군(君)
타츠고야마(立子山) 소학교의 동급생이었던 藤原貞次郎는, 박사의 소학교 시절에 대해 추억담을 해줬다. 칸이치군은, 신체는 학급 중에서 가장 작은 축에 속했지만, 타츠고야마에서는 유일한 무사의 아들로, 용의 단정하고 두뇌가 명석하여 아사카와 천신(朝河天神)이라 불렀다. 어느 시험이든 성적 1등이었고, 학년 말 수여식은 반드시 대표(総代)가 되어, 우등상을 받았다. 칸이치군은 매우 지기 싫어했다. 스모에서도 한두 번의 패배로는 굴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상을 치르다 (칸이치의 제1회 귀국)
고국 땅을 밟은 박사는, 모교 와세다에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메이지 39년(1906년) 2월 23일, 니혼마츠로 돌아갔다. 귀국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 우리 아이의 귀가를 일일여천추(一日千秋)의 생각으로 애타게 기다리던 아버지는, 10년 만에 보는 우리 아이의 몰라보게 출세한 모습에 그저 눈물만 글썽일 뿐, 굳게 잡은 손은 언제까지나 떠나지 않았다. 칸이치는 너무나 늙은 아버지의 눈빛을 보면서, 오래 전부터 쓰라린 고생(辛苦)을 배려하고, 천애만리(天涯万里)의 이국 땅에 있어 생각은 하면서도 효도하지 못한 것을 사과함과 함께, 아버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데 전념했다.
----나이 든 아버지(老父)는 갑자기, 장염전증(腸ねん転)을 일으켜, 9월 20일 61세를 끝으로 기구한 운명의 생애를 마감했다. 修徳院釈正澄仁慈居士의 유해는 대대로 위패를 놓고 기리는 곳(菩提所), 真行寺의 向山墓地에 묻혔다. 3일, 7일 공양을 마치고, 칸이치는 아부쿠마강(阿武隈河) 강가를 따라 타츠고야마 마을을 방문해 어릴 적 기거한 텐쇼지(天正寺)를 방문해, 할머니 야소(祖母ヤソ)와 계모 에이(継母ヱイ)의 무덤에 참배 공양하고 텐쇼지에 하룻밤을 묵고, 御代田에서 팥소를 넣은 떡(餡餅)과 토산물(土産物)을 가지고 일부러 만나러 온 누나 미키(姉キミ)와, 모여든 마을 친구와 즐거운 옛날 이야기로 하룻밤을 보냈다.(⇒텐쇼지에 숙박) 다음날은, 타츠고야마 소학교 강당에서 아사카와 박사 귀국 대환영회(朝河博士帰朝大歓迎会)가 개최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찍 일어난 박사는 타츠고야마 사무소(役場) 등에서 인사한 후, 환영회에 임하여 마을 주민 일동의 칭찬 환영에 따라 일장 연설을 하고,
「-----미국 대학생의 공부의 정도는, 일본에 비해 적은 것 같은데, 오히려 많다. 자신이 배우거나 가르친 다트머스나 예일의 양 대학이나 그 외 자신이 알고 있는 대학의 학생들의 공부는, 자신이 본 오늘날의 일본 학생들보다 훨씬 많이 공부하고 있다. 또 러일전쟁(日露戦争)에 대해서는, 영국이 미국의 원조가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고, 러일담판(日露の談判)에 대해서도 일본에서는 불만을 터뜨려 불지르기까지 했지만, 자신은 옵서버로 듣고 있었기 때문에, 스파이로 오해받기도 했다.일본 신문기자도 세계 외교의 무대에서 특종을 줍기 위해서는, 적어도 영어 정도는, 자유자재로 말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 내가 영어로 응대해 줬더니, 뒤에서 크게 분개했다는데, 앞으로 공부할 것은 매우 영어를 공부해야 한다.」
라는 말을 했다. 끝난 뒤 좌담회를 열어, 「교육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물어 달라」는 것이었지만, 학식의 차이가 심해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침묵을 지켰지만 몇몇 사람들로부터 생활에 대한 것과 음식에 관한 것 등만 물어 박사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菅野吉重 등이 러일 담판(日露談判)의 상황에 대해 질의응답하고 환영회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이노(飯野)까지 많은 이가 배웅했고, 카와마타(川俣)에 가서 도미(渡米)할 때 특별히 신세를 진 와타나베(渡邉)熊之助 (후의 弥七翁)에게 인사하고, 다시 니혼마츠로 돌아와, 코리야마(郡山)에 하차해 모교 아사카 중학교(安積中学校)를 방문해 학생 일동에게 올바른 영어 발음 등을 지도하여 인상을 남기고 도쿄로 돌아와, 모교 와세다의 영어 강사로서 영문학을, 고등사범부(高等師範部)에서는 영어학을 강의하면서, 예일대에서 위촉한 동양, 일본의 사학과 관련된 도서, 기록, 회화, 집기 등을 수집한 것이다.
마사즈미(正澄)의 퇴직
메이지 36년(1903년) 10월 29일 타츠고야마 소학교장을 퇴직한다. 피폐의 밑바닥에 있던 타츠고야마 마을이 풍속과 교화를 크게 고쳐, 메이지 43년 2월 25일 천하의 우량촌으로서, 내무대신으로부터 표창의 영예를 안게 된 초석은, 아사카와 교장(朝河校長)에 의해 세워진 것이 많은 것을 타츠고야마 마을사람은,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아사카와 교장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선생님의 오랜 공적에 대해, 주택을 건축해 영주해 주시게 할까, 아니면, 뭔가 기념품을 드려야 할지, 여러 가지 협의를 했지만, 「일단 선생님의 뜻을 들어봐야 한다」고 말해 선생님과 상의한 결과, 「친척과 구면인 이들이 있는 니혼마츠로 돌아갈 생각이다. 기념품은 금시계(金側時計)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있어, 즉시 협의하여 제자 7백여 명 응분의 갹출금으로 대형 금 회중시계(大型金側懐中時計) 및 금사슬(金鎖)을 구입하여, 大河内儀平 이하 갹출자 전원의 명단과 함께 선생님께 증정하였다.⇒ 「보은지사(報恩之辞)」
타츠고야마 마을의 개량 (立子山村の改良)
1874년(메이지 7년), 마사즈미가 타츠고야마 소학교장(小学校長)이 된다. 주지 円海와 함께 교육 지도에 임한다. 청년 지도의 야학회(夜学会)를 열다. 처녀에게는 재봉(裁縫)을 교수. 아동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촌민의 교도훈화(教導薫化).
현회 의장(県会議長)인 아사쿠라 테츠조(朝倉鉄蔵)는 아버지 鉄次郎와 함께, 아사카와 교장의 큰 후원자였다. 지방의 개량, 자치의 진흥을 생각하여, 우량 마을의 실적을 견문하고, 타츠고야마를 위해, 스스로 진두지휘의 임무를 맡는다.
메이지 33년 4월 27일, 타츠고야마 촌장(村長)에 취임하여, 즉시 촌지(村治)의 대개량(大改良)에 착수한다. 다테군(伊達郡) 모니와촌(茂庭村)에서 船尾與一를 등용하여 조역(助役)으로 삼고, 아사카와 교장(朝河校長)과 3파(三巴)가 되어 자치 진흥(自治の振興), 산업 장려(産業の奨励), 경제의 재건(経済の立て直し)에 매진하기 시작하였다. 아사카와 교장에 의한 덕화가 침투하고 있었기 때문에, 촌민도 자각해 가업(家業)에 정려(精励)하게 되어, 젊은 사람은 밤놀이를 그만두고 일찍 일어나자고 약속하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茶屋畑出酒를 그만두고 집안의 술(酌)을 한 병뿐으로 하고, 마을에 나갈 때는 반드시 야채, 땔감 등을 지참해 물건을 사는 대가로 하고, ----- 납세 성적은 해마다 향상되었다. 예를 들어, 관혼상제(冠婚葬祭)에는 납폐(結納), 성찬(馳走), 지참금(持参金), 조의(お悔やみ)는 답례품을 하지 않기로 합의하여,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였다. 능률 증진을 위하여, 때의 관념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아침, 점심, 저녁 세 번, 때를 알리는 것, 일찍 일어나는 것을 장려하고, 집 주변 청소, 벌초에 힘쓸 것, 절약저축 및 협동상조의 기관으로 타츠고야마무라 유종사(立子山村有終社)(신용구매판매이용조합)를 설립하여, 마을의 금융면을 원활하게 하고, 마을 산업을 장려하였다. 덕성회(徳成会)를 만들어, 청년 남녀의 수양연찬(修養研鑽)의 길을 열었다. 아사쿠라 테츠조 촌장은 메이지 36년 2월, 중의원 의원에 입후보해 당선돼, 촌장을 사퇴한다. 뒤를 이어서 佐藤多三郎, 船尾與一의 두 촌장이 계승하였다.
천하의 우량촌이 되다 (天下の優良村となる)
타츠고야마 마을(立子山村)은 메이지 43년 2월 25일에 선정(選奨) 29개 정촌(町村) 중 하나가 되어(전체 시정촌 중의 1%에도 되지 않음), 당시 내무대신 히라타 토스케(平田東助)의 이름으로 표창을 받았다.
「福島県伊達郡立子山村 協同輯睦率ヰテ克ク公共ノ事ニ謁クシ整理経営共ニ見ルヘキモノ少カラス 今後尚一層ノ奮励ヲ以テ互ニ相協力シ益々其ノ実績ヲ挙グヘシ 茲ニ金五百円ヲ授与ス」
(이상(以上)은、스즈키(鈴木)喜助의 원고에서의 발췌를 바탕으로 한) 아사카와 칸이치(朝河貫一) 박사 사후 70년 기념 강연회 in 타츠고야마 텐쇼지(立子山 天正寺), 2018년 10월 13일(土)
자료 : 아사카와 칸이치의 타츠고야마 시대(타츠고야마 초등학교장 스즈키(鈴木)喜助 『아사카와 칸이치』에서)
아버지・아사카와 마사즈미에 대하여
아사카와 마사즈미는 1844년(弘化元年) 9월 12일, 니혼마츠성의 북쪽 鉄砲谷 저택에서 宗形家의 아들로 태어난다. 아명을 小彌太, 후에 宗形幸八郎昌武라 칭하였다. 10세 무렵부터 같은 번의 小野派 일도류 사범인 日夏孫兵衛에 대해 검술을 배우고, 또 니혼마츠의 수학관에서 한학과 무술 수련을 실시한다. 1857년(安政4年)에 아버지와 함께 번의 에도 저택에 가고, 에도에서는 유생 田次郎八에 대해 한학을 배운다. 그 후 분큐 원년 정월부터 二本松藩 포술 사범 아사카와照清에게 포술을 배운다.
아사카와 가문은 대대로 니혼마츠 번사로서 번주 丹羽侯를 섬기고 二本松의 집안 저택인 郭内鉄砲谷의 저택에 살았다. 아사카와照清는 같은 번의 高木権太夫의 누나 야소와 결혼해 八太夫를 보았다. 照清의 아들 照成는 田口藩 번사 松浦竹之進의 장녀 우타를 맞아들여, 가독을 상속받아 장녀 이쿠, 차녀 기미가 태어난다. 그러나 照成는 텐구당의 난(天狗党の乱)으로 전사하고, 우타는 미망인이 된다.
무진전쟁이 일어나자, 아사카와가의 당주인 照清도 방위대 일원으로 출진하여 1868년(慶応4年) 7월 29일 니혼마츠 낙성(落城)의 날 大手門 앞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9월 23일에 아이즈 와카마츠(会津若松)도 개성(開城)해 전란은 가라앉지만, 니혼마츠 사람들에게 고난이 닥친 것은 그로부터이다. 전쟁 중 서군에게 짓밟혀 논밭은 황폐해지고 오곡은 익지 않으며 혼란을 틈타 도적은 밤낮없이 횡행했다. 역적의 무리(賊徒)라는 오명 아래 토벌된 사족(士族)들의 전후(戦後) 피로곤비(疲労困憊)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고, 가택지, 보물은 소실되거나 약탈당했다. 번적을 봉환했기 때문에 봉록은 받지 못하고 그날의 식량도 없는 구렁텅이 생활이 된다. 아사카와 가문은 照清, 照成 모두 전사해 일가의 기둥(柱石)을 잃고, 저택도 전화로 모조리 불타 없어지고, 우타와 두 딸, 시어머니 야소는 고난의 몇 달을 견딘다.
아사카와(朝川) 일가는 우타가 이를 떠받쳤다. 낮에는 바느질 스승이 되고 밤에는 이웃집에서 바느질과 빨래, 빨래 등을 도맡아 근소한 임금을 받아 겨우 생계를 이어왔는데, 그에 동정한 집안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宗形가문의 둘째 아들 幸八郎昌武를 사위 양자로 맞아들인 것이 메이지 2년 9월의 일이었다. 昌武는 아사카와가에 들어가 사위한 뒤 이름을 功으로 고치고, 일가를 짊어지게 된다. 가록은 정지되고 저축은 없고 정직도 없다. 당장 낮에는 수습 스승이 되어 인근 자제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어두컴컴한 등불 아래서 우산을 쓰고 부업에 힘썼다. 아사카와는 어두울 때부터 밤늦게까지 일심불란하게 일했다. 그러나 한 가족의 생계를 지탱하기에 충분한 임금은 얻을 수 없었다. 그 무렵 장남 칸이치(貫一)가 태어났다. 功으로 개명한 昌武는 다시 이름을 마사즈미(正澄)로 고치고, 초등학교 교원 지원서를 제출하여, 메이지 7년 7월, 다테군(伊達郡) 타츠고야마 소학교(立子山小学校)에 부임하였다.
니혼마츠에서 타츠고야마로
타츠고야마는 전국 시대 이후 가모(蒲生), 우에스기(上杉), 혼다 마사나가(本多政長)의 영지가 되는 등의 변천은 있었지만, 양잠업이 번성하고 생사, 羽二重를 낳는 관계로 막부령이 되어 대관소의 지배하에 놓였다. 이른바 천령(天領)이라 직접 통어되는 일이 적고 공조부역(貢租賦役)도 느슨하여 노는 이도 많았으며 풍기는 문란하고 도박은 유행하며 검소 근면의 미풍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메이지 유신 시기, 촌민의 생계는 곤란해져 마을은 피폐해져 있었다. 마을 주민 중에는 논밭 산림을 전당포하고 조상 전래 택지 건물을 남의 손에 넘기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이 타츠고야마(立子山)에 왜 마사즈미(正澄)가 교원으로서 부임하게 되었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아사쿠라 테츠조(朝倉鉄蔵 후쿠시마 현회 의장을 맡은 후에 중의원 의원)의 다음과 같은 술회가 있다.
「나의 아버지, 테츠지로(鉄次郎)는 농업의 한편 지방의 산물인 생고치의 전매 알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치 판매를 위해, 니혼마츠의 제사 회사인 双松館에 출입해, 佐野利八 전 사장이나 山田修 등과 친분이 있었다. 마을에 소학교를 개설하게 되었을 때 마을의 장래를 생각하고 마을 개량을 도모하려면 인심의 교화가 선결 문제이다. 그러려면 우량한 교원을 뽑아야 하지만 마을 안에는 적임자가 없다. 예로부터 학문이 왕성했던 니혼마츠에는 학덕이 높은 옛 번사가 많이 계실 터이니 한 가지 의논해 보자 하여 친분이 있던 山田옹에게 그 추천을 부탁하였다. 사정을 들은 옹은 잠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 거기에는 아사카와 마사스미 군이 최적임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친하게 지내고 있지만 동군(同君)은 요즘 옛 번사로 한학의 소양도 깊고 인격도 고결하여 나무랄 데 없는 분이다."라고 말했다. 본인을 만나 마을 사정을 이야기하고 희망 여부를 물었다. 山田옹의 말대로 훌륭한 인격자였기 때문에 마을로 돌아가 상의하고 일동의 찬성을 얻은 후 절차를 밟아 우리 마을에 초빙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사즈미(正澄)는 다치코야마(立子山)에 부임하게 된다. 마사즈미가 부임한 1874년(메이지 7년) 무렵, 철도는 물론 없고, 도로도 차마(車馬)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일가(一家)는 당분간 필요한 가재도구를 휴대해, 침구는 인부에게 짊어지게 해 니혼마츠에서 시부카와(渋川), 시모카와사키(下川崎)로 나와 아부쿠마 천(阿武隈川)을 건너, 니시이노(西飯野)에서 산길을 오르내려 15킬로를 도보로 걸어 타츠고야마(立子山)에 입성했다.
타츠고야마(立子山)에서의 생활
다츠고야마 소학교(立子山小学校) 연혁지에는 「메이지 7년 8월 7일, 삼등 수업생(三等授業生)·아사카와 마사즈미(朝河正澄) 착임하다, 월급 4엔」이라고 쓰여 있다. 전년 12월 태어난 칸이치(貫一)는, 생후 불과 200여일 만에 다츠고야마으로 옮겨 살았다. 한여름 땡볕을 받으며 칸이치를 등에 업고 동행한 우타의 노고는 얼마나 됐을까. 마을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주었지만, 일가(一家)가 가교실(仮教室)로 정해진 大平山 텐쇼지(天正寺) (조동종(曹洞宗))에 이르렀을 때만 해도 우타의 몸은 솜털처럼 지쳐 있었다.
하지만, 일가(一家)는 주지 스님 가족이 지내는 공간(庫裡)의 한 방을 임시 거처(仮寓)의 장소로 제공받아, 마을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대우를 받는다. 주지(住職)인 円海스님도 여러가지로 잘 챙겨주었다. 결국 마사즈미(正澄)는 1903년 10월 29일까지 30년 동안, 마을 교육의 중심이 되어, 영달을 바라지 않고 평범하게 지내면서도 비범한 세월을 마을에서 보냈다. 마을을 개량한 것이 마사즈미이며, 다츠고야마 촌(立子山村)은 마사즈미의 노력으로 1910년 2월 25일, 우량 마을(優良村)로 내무대신(内務大臣)으로부터 표창을 받기에 이른다.
다츠코야마 소학교의 창설은, 메이지 7년 7월 25일로, 처음에는 학생수가 적어, 텐쇼지(天正寺) 객전(客殿) 밖에 있는 방 52평 반(52坪半)을 빌려 임시 교실로 삼았다. 아사카와(朝河) 일가에게는 주지 스님 가족이 지내는 공간(庫裡)의 한 방의 한 방을 제공했다. 마사즈미는 박학다식, 능필가(能筆家), 무예(武芸)의 달인으로, 무사의 예절을 지키며 항상 하오리 하카마(羽織袴)를 착용하고 단좌하여 외모를 무너뜨리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아사카와 텐진(朝河天神)」이라 불렸다. 그리고 마을의 실상(実情), 마을의 습속(習俗)도 알게 되었고, 마사즈미는 친절하고 공손히(懇切丁寧) 교육지도를 맡았기 때문에 평판이 좋았다. 게다가, 그동안 이 마을에는, 마땅한 바느질 선생(お針の師匠)이 없어 애를 먹고 있었기 때문에, 재봉(裁縫)에 능통한 우타가 왔으므로 마을 처녀들은 크게 기뻐했고, 농한기에는 바느질 하는 처자(針子)가 실내에 넘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우타의 호평도 마사즈미보다 나으면 낫지 못하지 않았다. 우타는 마을 여성들의 중심축이 되어 재봉을 가르쳤으며, 특히 연말연시 농한기에는 매우 바빴다. 그래서인지 쇠약해져 죽고 만다. 우타의 시신은 니혼마츠(二本松)의 신교지(真行寺)에 묻혔다. 그 후, 아이들은 니혼마쓰에서 온 할머니 야소(ヤソ)가 길러서 어머니를 잃은 후 몇 년을 보냈는데, 학교용 담당(学校用係)인 阿部善次郎가 다테군(伊達郡) 야나가와마치(梁川町)의 텐진사(天神社) 신관(神官) 関根備의 여동생 에히(ヱヒ)를 후처로 소개하였다.
타츠고야마 소학교는 개교 당시, 100명이 채 안 되는 학생 수였다. 円海스님과 둘이서 수업을 맡았다. 이듬해인 메이지 8년에는 재적 학생 수가 187명으로 늘어나고, 성적 우수자를 수업생(授業生)이라고 하여 돕게 하자, 텐쇼지(天正寺)의 객전(客殿)으로는 좁아졌다. 촌민들의 헌금을 모아 메이지 8년, 마을 중앙 字竹 아래 19번지에 교사(校舎)를 신축하였다. 지조개정(地租改正)으로 반대자도 있어, 경비 조달이 어려워져 공사가 중단되었으나, 이듬해 7월에 개교식이 거행되었다. 남쪽으로 향한(南面した) 교장실에는 하오리 하카마(羽織袴)로 위의를 바로잡은 마사즈미가 있었다. 북쪽으로 접한 곳(北隣)에 주택이 있어, 칸이치(貫一)는 다섯 살 여름 때부터 초등학교 시절, 중학교 시절, 와세다 시대도, 메이지 28년(1895년)에 도미(渡米)할 때까지 약 22년간, 이곳을 면학과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다.
마사즈미의 교육
마사즈미는 교육에서는 문부성 편찬의 단어편(単語篇), 연어편(連語篇), 소학독본(小学読本), 수신훈(修身訓)을 가르쳤는데, 가르치는 정신은 문명 개화의 그것이 아니라, 일찍이 배운 유교사상(儒教思想), 무사도정신(武士道精神)이었다. 또 교수방법도 상급생이 하급생의 학습을 봐주고, 졸업생 중 성적 우수자를 뽑아 조교로 만드는 정도였다. 마사즈미가 가장 서투른 것은, 주산(珠算)과 양법 산술(洋法算術)이었다. 학생들에게 매우 친절했기 때문에 학부형(父兄)의 신뢰도 높아졌다. 타츠코야마에는 취학하지 않는 사람이 상당했는데, 개교 당시 60여 명이었던 것이, 1년 후, 메이지 8년 12월에는 학생(生徒)수, 남 95명, 여 39명, 합계 134명이 되었고, 메이지 10년 12월에는 남 125명, 여 67명, 합계 192명이 되었으며, 메이지 13년에는 남 128명, 여 99명, 합계 249명이 된다. 메이지 12년 9월, 마사즈미는 6등 훈도보(六等訓導補)가 됐고 월급도 10엔이 된다. 후처 에히(ヱヒ)도 마을 사람들과 친하게 교제하고 재봉을 잘했기 때문에 바느질 하는 처자(針子)도 방을 가득 채웠다.
소년 칸이치(貫一)에 대한 교육
에히(ヱヒ)는 칸이치(貫一)에게 책을 읽게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손을 쥐어 쓰게 했다. 안에서는 지능을 연마시키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 산에 오르게하고, 낚시를 권해서 몸을 단련시켰다. 칸이치는 선천적으로(生来) 허약했지만 몸도 튼튼해진다. 일찍부터 가정교육을 받은 칸이치는 대여섯 살에 이미 그 지능은, 여덟 아홉 살 아이 이상으로 앞서 있었다. 5세 3개월로, 아직 학령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메이지 12년 4월 타츠코야마 소학교에 입학한다. 하오리 하카마(羽織袴)를 착용하고 있었다. 하나를 듣고 열을 아는 아이였다. 메이지 15년 보통소학교(普通小学校)를 졸업하고, 메이지 18년 중등소학교(中等小学校)를 졸업했으며, 메이지 20년 고등소학교(高等小学校)를 졸업했다. 8, 9세 때 13, 14세 아동을 능가하여, 칸이치는 어느 시험에서도 으뜸이었고, 진급식에는 학생 대표(生徒総代)로 우수상을 받았다. 가와마타(川俣)나 이노(飯野)에서 실시된 비교시험(比較試験)에서는, 칸이치가 타츠고야마교(立子山校)를 대표해서 나가, 항상 최우수였기 때문에 「2대 아사카와 텐진(二代目朝河天神)」으로 불렸다. 메이지 18년 4월의 소학교의 중등 제1급 졸업에 즈음하여 11세 4개월의 칸이치는, 후쿠시마현으로부터 학력 우등에 붙어서, 일등상으로 호주머니 벼룻집(懐中硯箱) 한 개를 받았다.
마사즈미는 칸이치에게 책읽기 지도를 할 뿐만 아니라 타츠고야마에 남아 있는 전설과 니혼마츠의 지리연혁, 무진(戊辰)의 전란, 니혼마츠 소년대(二本松少年隊)의 분전, 낙성(落城)의 상황, 그 후의 고난을 들려주어, 장래에는 학자로서 세상에 나오도록 가르쳤다. 백모(伯母) 야에(八重)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코리야마(郡山)의 안도(安藤)가(家)에서 태어난 안도(安藤)祐助, 즉 후의 아사카 곤사이(安積艮斉)가 학문을 좋아하여 에도(江戸)에 올라가 각고의 노력을 하여 쇼헤이코(昌平黌)의 유관(儒官)이 되어 천하의 제일유(第一儒)로 추칭되게 된 경위(次第)를 상세히 들려주었다. 칸이치의 백모 야에는, 니혼마츠 신사의 신관 安藤重宣의 아내로, 이 安藤重宣는 郡山安積国造神社의 신관(神官)인 安藤親重의 손자였다. 큰 숙부(大叔父) 祐助는 아버지 親重와 함께 어린 시절을 니혼마츠에서 보냈다. 祐助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藩儒에 대해 한문 서적(漢籍)을 배운다. 에도에 나가 사토 잇사이(佐藤一斉)의 문(門)으로 들어가 대성하여, 쇼헤이코(昌平黌)의 유관(儒官)이 된다. 安積艮斉는 그 호(号)이다. 艮斉는 사학(史学)에 정통했다. 칸이치는 백모 야에로부터도 艮斎의 사람됨을 듣고, 또한 중학교에서 艮斎의 생가를 드나들며 칸이치의 향학심(向学心)에 박차를 가하였다.
타츠고야마(立子山) 텐쇼지(天正寺)의 벽화
벽화는 칸이치가 출생 후, 다섯 살 여름까지 임시 거처한 텐쇼지(天正寺) 본당 정면의 하얀 벽에 낙서한 거칠게 달리는 말(奔馬)의 그림이다. 초봄의 화창한 날에 円海스님이 유명한 나무(名木)인 남천(南天)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칸이치는, 노승이 손질을 마치고 사다리를 본당 오른쪽 옆 백벽에 치웠을 때, 아버지 책상 위에서 작은 벼루(矢立)를 꺼내들곤, 붓도 쥐지 않고 크고 작은 여섯 마리의 거칠게 달리는 말(奔馬)이 머리를 흔들며 경쟁하는 광경을 그린다. 그것은 천진난만하고 웅혼한, 다섯 살짜리 아이가 썼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훌륭한 필치였다. 그렸다고 시끄럽게 떠드는 칸이치에게 円海스님은 놀란다. 그러나 円海스님은, 이 낙서는 계속 이대로 두라고 했기 때문에 그대로 남았다.
소학교 동급생이 말하는 칸이치(貫一)군(君)
타츠고야마(立子山) 소학교의 동급생이었던 藤原貞次郎는, 박사의 소학교 시절에 대해 추억담을 해줬다. 칸이치군은, 신체는 학급 중에서 가장 작은 축에 속했지만, 타츠고야마에서는 유일한 무사의 아들로, 용의 단정하고 두뇌가 명석하여 아사카와 천신(朝河天神)이라 불렀다. 어느 시험이든 성적 1등이었고, 학년 말 수여식은 반드시 대표(総代)가 되어, 우등상을 받았다. 칸이치군은 매우 지기 싫어했다. 스모에서도 한두 번의 패배로는 굴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상을 치르다 (칸이치의 제1회 귀국)
고국 땅을 밟은 박사는, 모교 와세다에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메이지 39년(1906년) 2월 23일, 니혼마츠로 돌아갔다. 귀국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 우리 아이의 귀가를 일일여천추(一日千秋)의 생각으로 애타게 기다리던 아버지는, 10년 만에 보는 우리 아이의 몰라보게 출세한 모습에 그저 눈물만 글썽일 뿐, 굳게 잡은 손은 언제까지나 떠나지 않았다. 칸이치는 너무나 늙은 아버지의 눈빛을 보면서, 오래 전부터 쓰라린 고생(辛苦)을 배려하고, 천애만리(天涯万里)의 이국 땅에 있어 생각은 하면서도 효도하지 못한 것을 사과함과 함께, 아버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데 전념했다.
----나이 든 아버지(老父)는 갑자기, 장염전증(腸ねん転)을 일으켜, 9월 20일 61세를 끝으로 기구한 운명의 생애를 마감했다. 修徳院釈正澄仁慈居士의 유해는 대대로 위패를 놓고 기리는 곳(菩提所), 真行寺의 向山墓地에 묻혔다. 3일, 7일 공양을 마치고, 칸이치는 아부쿠마강(阿武隈河) 강가를 따라 타츠고야마 마을을 방문해 어릴 적 기거한 텐쇼지(天正寺)를 방문해, 할머니 야소(祖母ヤソ)와 계모 에이(継母ヱイ)의 무덤에 참배 공양하고 텐쇼지에 하룻밤을 묵고, 御代田에서 팥소를 넣은 떡(餡餅)과 토산물(土産物)을 가지고 일부러 만나러 온 누나 미키(姉キミ)와, 모여든 마을 친구와 즐거운 옛날 이야기로 하룻밤을 보냈다.(⇒텐쇼지에 숙박) 다음날은, 타츠고야마 소학교 강당에서 아사카와 박사 귀국 대환영회(朝河博士帰朝大歓迎会)가 개최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찍 일어난 박사는 타츠고야마 사무소(役場) 등에서 인사한 후, 환영회에 임하여 마을 주민 일동의 칭찬 환영에 따라 일장 연설을 하고,
「-----미국 대학생의 공부의 정도는, 일본에 비해 적은 것 같은데, 오히려 많다. 자신이 배우거나 가르친 다트머스나 예일의 양 대학이나 그 외 자신이 알고 있는 대학의 학생들의 공부는, 자신이 본 오늘날의 일본 학생들보다 훨씬 많이 공부하고 있다. 또 러일전쟁(日露戦争)에 대해서는, 영국이 미국의 원조가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고, 러일담판(日露の談判)에 대해서도 일본에서는 불만을 터뜨려 불지르기까지 했지만, 자신은 옵서버로 듣고 있었기 때문에, 스파이로 오해받기도 했다.일본 신문기자도 세계 외교의 무대에서 특종을 줍기 위해서는, 적어도 영어 정도는, 자유자재로 말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 내가 영어로 응대해 줬더니, 뒤에서 크게 분개했다는데, 앞으로 공부할 것은 매우 영어를 공부해야 한다.」
라는 말을 했다. 끝난 뒤 좌담회를 열어, 「교육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물어 달라」는 것이었지만, 학식의 차이가 심해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침묵을 지켰지만 몇몇 사람들로부터 생활에 대한 것과 음식에 관한 것 등만 물어 박사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菅野吉重 등이 러일 담판(日露談判)의 상황에 대해 질의응답하고 환영회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이노(飯野)까지 많은 이가 배웅했고, 카와마타(川俣)에 가서 도미(渡米)할 때 특별히 신세를 진 와타나베(渡邉)熊之助 (후의 弥七翁)에게 인사하고, 다시 니혼마츠로 돌아와, 코리야마(郡山)에 하차해 모교 아사카 중학교(安積中学校)를 방문해 학생 일동에게 올바른 영어 발음 등을 지도하여 인상을 남기고 도쿄로 돌아와, 모교 와세다의 영어 강사로서 영문학을, 고등사범부(高等師範部)에서는 영어학을 강의하면서, 예일대에서 위촉한 동양, 일본의 사학과 관련된 도서, 기록, 회화, 집기 등을 수집한 것이다.
마사즈미(正澄)의 퇴직
메이지 36년(1903년) 10월 29일 타츠고야마 소학교장을 퇴직한다. 피폐의 밑바닥에 있던 타츠고야마 마을이 풍속과 교화를 크게 고쳐, 메이지 43년 2월 25일 천하의 우량촌으로서, 내무대신으로부터 표창의 영예를 안게 된 초석은, 아사카와 교장(朝河校長)에 의해 세워진 것이 많은 것을 타츠고야마 마을사람은,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아사카와 교장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선생님의 오랜 공적에 대해, 주택을 건축해 영주해 주시게 할까, 아니면, 뭔가 기념품을 드려야 할지, 여러 가지 협의를 했지만, 「일단 선생님의 뜻을 들어봐야 한다」고 말해 선생님과 상의한 결과, 「친척과 구면인 이들이 있는 니혼마츠로 돌아갈 생각이다. 기념품은 금시계(金側時計)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있어, 즉시 협의하여 제자 7백여 명 응분의 갹출금으로 대형 금 회중시계(大型金側懐中時計) 및 금사슬(金鎖)을 구입하여, 大河内儀平 이하 갹출자 전원의 명단과 함께 선생님께 증정하였다.⇒ 「보은지사(報恩之辞)」
타츠고야마 마을의 개량 (立子山村の改良)
1874년(메이지 7년), 마사즈미가 타츠고야마 소학교장(小学校長)이 된다. 주지 円海와 함께 교육 지도에 임한다. 청년 지도의 야학회(夜学会)를 열다. 처녀에게는 재봉(裁縫)을 교수. 아동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촌민의 교도훈화(教導薫化).
현회 의장(県会議長)인 아사쿠라 테츠조(朝倉鉄蔵)는 아버지 鉄次郎와 함께, 아사카와 교장의 큰 후원자였다. 지방의 개량, 자치의 진흥을 생각하여, 우량 마을의 실적을 견문하고, 타츠고야마를 위해, 스스로 진두지휘의 임무를 맡는다.
메이지 33년 4월 27일, 타츠고야마 촌장(村長)에 취임하여, 즉시 촌지(村治)의 대개량(大改良)에 착수한다. 다테군(伊達郡) 모니와촌(茂庭村)에서 船尾與一를 등용하여 조역(助役)으로 삼고, 아사카와 교장(朝河校長)과 3파(三巴)가 되어 자치 진흥(自治の振興), 산업 장려(産業の奨励), 경제의 재건(経済の立て直し)에 매진하기 시작하였다. 아사카와 교장에 의한 덕화가 침투하고 있었기 때문에, 촌민도 자각해 가업(家業)에 정려(精励)하게 되어, 젊은 사람은 밤놀이를 그만두고 일찍 일어나자고 약속하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茶屋畑出酒를 그만두고 집안의 술(酌)을 한 병뿐으로 하고, 마을에 나갈 때는 반드시 야채, 땔감 등을 지참해 물건을 사는 대가로 하고, ----- 납세 성적은 해마다 향상되었다. 예를 들어, 관혼상제(冠婚葬祭)에는 납폐(結納), 성찬(馳走), 지참금(持参金), 조의(お悔やみ)는 답례품을 하지 않기로 합의하여,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였다. 능률 증진을 위하여, 때의 관념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아침, 점심, 저녁 세 번, 때를 알리는 것, 일찍 일어나는 것을 장려하고, 집 주변 청소, 벌초에 힘쓸 것, 절약저축 및 협동상조의 기관으로 타츠고야마무라 유종사(立子山村有終社)(신용구매판매이용조합)를 설립하여, 마을의 금융면을 원활하게 하고, 마을 산업을 장려하였다. 덕성회(徳成会)를 만들어, 청년 남녀의 수양연찬(修養研鑽)의 길을 열었다. 아사쿠라 테츠조 촌장은 메이지 36년 2월, 중의원 의원에 입후보해 당선돼, 촌장을 사퇴한다. 뒤를 이어서 佐藤多三郎, 船尾與一의 두 촌장이 계승하였다.
천하의 우량촌이 되다 (天下の優良村となる)
타츠고야마 마을(立子山村)은 메이지 43년 2월 25일에 선정(選奨) 29개 정촌(町村) 중 하나가 되어(전체 시정촌 중의 1%에도 되지 않음), 당시 내무대신 히라타 토스케(平田東助)의 이름으로 표창을 받았다.
「福島県伊達郡立子山村 協同輯睦率ヰテ克ク公共ノ事ニ謁クシ整理経営共ニ見ルヘキモノ少カラス 今後尚一層ノ奮励ヲ以テ互ニ相協力シ益々其ノ実績ヲ挙グヘシ 茲ニ金五百円ヲ授与ス」
(이상(以上)은、스즈키(鈴木)喜助의 원고에서의 발췌를 바탕으로 한) 아사카와 칸이치(朝河貫一) 박사 사후 70년 기념 강연회 in 타츠고야마 텐쇼지(立子山 天正寺), 2018년 10월 13일(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