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네덜란드-인도네시아 대화모임(일란이 대화모임 日蘭イ対話の会) 대표 탕게나 鈴木由香里씨로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 포로 문제와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전개와 관련된 일본-네덜란드-인도네시아의 대화와 화해를 둘러싼 에세이가 투고되었습니다.

학술적인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40여년 전부터 네덜란드에 거주해 왔으며, 그동안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해 온 일들을 아래에 기술한다.이것은 2018년 12월 8일에 와세다 대학에서 화해학의 미디어판 연구회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자기소개
1968년 고등학교 3학년 때 교환 유학으로 미국에 1년간 머물렀다.그 한 해는 귀중한 체험을 다양하게 할 수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이 있다.같은 프로그램으로 미국에 와 있던 한국인 유학생이 "나는 일본어를 말할 수 있어, 조생진 노바카야로!"라고 말을 건 것이었다.그때까지의 나에게 전쟁이란 어머니로부터 들은 소이탄의 무서움이나 원자폭탄의 매우 슬픈 이야기였고, 교실에서 배운 조선이나 대만을 식민지로 삼았던 것이나 아시아 침략은 책상 위의 이야기일 뿐이었다.당시는 베트남 전쟁이 아직 길어지고 있던 때였고, 미국의 보통 고등학생들도 전쟁이나 평화를 자주 논의하던 때였다.그리고 내 주변에는 전쟁 반대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것에 정의감을 느끼던 나에게는 눈앞에 내 나라의 잘못을 들이밀린 기분이 들었다.그 경험으로 대학에서는 국제관계에 흥미를 가지고 국제사회학을 츠루미 카즈코 선생님으로부터, 그리고 문화접촉학을 히라노 켄이치로 선생님의 수업과 세미나에서 배웠다.
졸업 후 작은 상사 주재원으로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일하다가 네덜란드인과 결혼해 네덜란드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또 한번 충격적인 일을 만났다.어느 날 점잖은 낯선 부인으로부터 갑자기 슈퍼에서 당신은 일본인?이라고 말을 걸었다.외국 상례에서 동양인들은 대개 시네제(중국인)라고 해서 빙그레 웃으며 그래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부인은 그녀가 태평양 전쟁 중 강제로 일본군 억류소에 갇혀 있었던 것, 거기서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를 마침내 말하기 시작했다.
1980년 전후로 그런 경험을 두 번 정도 했다.당시 네덜란드인 중에 살던 일본인들은 대개 이런 경험을 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네덜란드가 현재의 인도네시아,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식민지로 삼고 있었고, 2차대전 태평양전쟁 중 일본군과 싸웠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민간 네덜란드 여성과 어린이들까지 열악한 환경에서 강제 억류돼 혹독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눈물을 글썽이며 그런 말을 하는 부인에게서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 지금도 극명하게 생각난다.그때 왜 그렇게 충격을 받았느냐는 이유가 두 가지다.전쟁 중이라고는 하지만 그분이 말하는 만행을 일본군이 부녀자에게까지 한 사실과 자신이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그 후 점차 네덜란드어도 배우고 신문과 TV도 알게 되자 이 나라에서는 독일과 일본에 대해서는 마치 악의 상징처럼 말해도 OK라는 것을 깨달았다.이렇게 반일의 나라인 줄 모르고 엉뚱한 곳에 살게 돼 버렸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튤립과 풍차가 아름다운 꿈의 나라는 일전하고 으쓱한 반일 감정이 넘치는 어두운 나라로 보였다.
일본-네덜란드 전쟁(日蘭戦争)
그렇다면 도대체 전쟁 중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진제공NIOD
전쟁 중 약 6만5천~7만명의 네덜란드 부녀자가 억류소에 격리돼 있었다.전쟁 막바지에 이르자 억류자가 늘어나 대나무로 만든 받침대 위에 모자 4명으로 대개 다다미 2첩 정도의 장소만 주어졌다.
사진제공NIOD
억류소의 하루는 점호로 시작해 쇼와 천황의 그림자 앞에서 가장 경례를 해야 했다.일본 경비병들은 대체로 잔혹하고 사소한 일로 때리는 차기, 남국의 뙤약볕에 양손에 양동이의 물을 들고 서게 하는 등 폭력이 일상적이었다.참조 : 「어머니에 대한 찬가」(이노치노코토바社)
전쟁이 끝나갈수록 식량은 하루 죽 한 그릇이면 되는 편이었고 의약품도 없어 영양실조와 질병이 만연해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네덜란드는 지금의 인도네시아를 300년 이상 식민지로 통치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라고 해도 그 당시에는 아직 인도네시아라는 나라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부족에 의해 분할된 광활한 섬들로 이루어진 땅으로 태평양 전쟁 이후 처음으로 국가로 성립되었다.현재 네덜란드의 부유한 재산의 기초의 대부분은 이 식민지에서 얻은 이윤이라고 한다.
지난 300년이 넘는 통치 속에서 당연히 현지인들과의 사이에 자녀도 태어났지만 식민지 정책으로는 현지인들과의 결혼은 허용되지 않았다. 더구나 인종차별을 분명히 내세운 어디까지나 백인을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형 사회에서 이 피라미드 위쪽에 있던 사람들이 주로 일본군 수용소 억류소에 갇힌 것이었다.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을 아파르트헤이트라고 하는데, 이 말은 네덜란드어로, 그러한 인종에 의해 계급을 정한 식민지 통치가 이곳에서도 행해지고 있었다.그래서 억류자들에게 백인종이 아닌 일본인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굴욕이었다.이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의 수는 포로, 부녀자를 모두 합치면 9만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즉 아버지는 포로로 어머니와 아이들은 민간 억류소에 갇혀 있었다는 얘기다.또 남자아이는 11세가 되자 엄마에게서 떨어져 소년 억류소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갖가지 고역을 치렀다. 이런 수용소에 들어갈 수 없었던 네덜란드계 사람들은 운이 좋았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고 수확한 거의 모든 식량을 일본군이 빼앗아 버리기 때문에 식량이 극도로 부족했고, 게다가 독립운동이 시작된 땅에 있어 현지인들과 생활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진제공NIOD
이 사진은 아마 일본인들은 나치 독일의 수용소 사진으로 생각하겠지만 네덜란드를 포함한 연합국 포로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포로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었다.
사진제공NIOD
태국과 버마(현재의 미얀마)에 걸친 타이쇼 철도의 강제노동수용소는 영화 등에서도 유명한데 이곳에서는 포로의 무려 38%가 사망했다.그리고 그 철도가 완성된 후 이들은 다시 일본 등으로 이송되어 국내 탄광 광산 조선소 등 당시 130여 개에 달했던 일본 내 포로수용소에서 또다시 가혹한 노동을 해야 했다.
사진제공NIOD
여기서 더 잊어야 할 것은 인도네시아를 비롯해 롬샤로 불린 아시아 국가에서 쫓겨난 사람들로 이들은 연합국 포로들보다 더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그러나 연합군 포로들에 관해서는 상당히 정확한 명단이 있고 숫자가 나와 있지만 롬샤의 수는 20만 명 이상으로 추측되고 있을 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사람은 약 20% 정도였을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네덜란드-인도네시아 대화모임(일란이 대화모임 日蘭イ対話の会)
네덜란드는 일본이 쇄국을 하는 동안에도 데지마에 상관을 계속 갖고 일본과 독점 무역을 하고 있었다.또 전후에도 양국은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그러나 일본과 네덜란드는 표면상으로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의 나라로 간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국내는 실로 반일적인 나라라는 사실은 일본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예를 들어 그보다 거슬러 올라가 1971년에는 쇼와 천황이 네덜란드를 공식 방문했을 때 토마토와 달걀이 던져지거나 식목된 모종이 뽑히기도 했다.또 1986년 네덜란드의 베아트릭스 여왕이 일본을 방문한다는 예정이 발표됐을 때 전국에 대반대 폭풍이 일어나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이어 1991년에는 해부 총리가 란링 동인도 전쟁 희생자 기념비에 바친 화환이 몇 시간 만에 인근 연못에 던져졌다.그런데 이런 일은 별로 일본 언론은 크게 다루지 않았고,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눈은 경제관계에만 쏠려 있었다.그런 양국은 2000년을 통상 400주년 축하의 해로 화려하게 축하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이면에 숨겨진 현실을 제대로 보고 네덜란드의 일본인 크리스천과 네덜란드인 크리스천들에 의해 작은 출판기념회(*)가 열렸다.네덜란드에 살고 있는 일본인과 일본군에 의해 육체와 정신에 큰 상처를 입은 네덜란드인들이 전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만날 기회가 마련됐다.처음에는 그 모임은 일회성으로 기획되었지만, 참가자들로부터 좀 더 이런 기회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후 매년 개최되어 현재까지 20차례나 대화 모임이 개최되었다.*「」林에다이著 「」 Wim Lindeijer(비무 린다이야)著
지난해(2017년) 20회째를 기념해 대화모임 책이 출간됐는데, 이 모임은 어디까지나 개인과 개인 간의 직접 대화를 통한 시민 차원의 화해를 독려하고 있다.또 일란 양국이 그 풍부한 자원을 착취해 그 권리를 놓고 그 땅을 전쟁터로 만들어 버린 인도네시아도 2012년에 가세하면서 활동의 폭이 더욱 넓어지고 있다.
40년 전과 비교해 갑자기 일본인에게 말을 거는 사람도 없어졌고 동일본 대지진 때는 온 나라가 일본을 위해 기도하고 기부를 모아줬다.그리고 대화 모임에 모이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을 증오에서 해방시키려고 참여하지만 네덜란드 안에서는 지금도 매달 둘째 주 화요일에 헤이그에 있는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사진제공SJE*
사진제공SJE
*SJE(対日道義負債補償財団http://www.japanse-ereschulden.nl/english/)
그렇다면 네덜란드 반일 감정의 이 뿌리 깊이는 왜일까?
종전을 맞아 곧바로 인도네시아는 독립선언을 했지만 네덜란드는 또 그 땅을 식민지로 다시 수중에 넣으려고 시도했고 두 차례의 군대 파병이 이뤄졌다.그러나 마침내 1959년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쟁취했고, 그에 따라 그곳에 살던 네덜란드계 사람들은 자기 나라로 여겼던 남국의 낙원에서 쫓겨나 네덜란드라는 추운 나라로 이주해야 했다.더구나 그곳에서 기다린 것은 독일과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네덜란드의 냉랭한 대응이었다.이들은 자신들이 일군 풍요로운 식민지 생활에서 쫓겨 전 재산을 잃고 자기 나라로 꼽혔던 추운 북유럽 국가로 난민처럼 내몰렸다.그 억울함을 안고 일본인만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강한 생각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
또 포로였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른 연합국 포로들과 동인도군 포로들에게는 큰 차이가 있었다.다른 연합국 포로들은 가족을 모국에 남겨뒀지만 네덜란드 포로들은 자신이 수용된 동안 부인과 아이들 등 가족들도 억류소에 갇혀 있었다.그리고 연합국 포로들은 전쟁이 끝나고 모국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들은 다시 다음 전쟁에 끌려가 결국 나라를 쫓기고 말았다.
사실 전후 70여 년이라고는 하지만 지금도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원폭 덕분에 자신들이 살아났다고 말하기만 한다.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희생됐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대부분의 언론도 동조하고 있어 재미있게도 원폭 반대 구호와는 마치 모순이 없는 것처럼 빠져나가고 있다.일본의 일반적인 전쟁 인식과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캐롤 글락 컬럼비아대 교수는 각국의 역사교과서는 '집합적 기억'에 불과하다고(*)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은 이만저만이 아니다.그러나 먼저 그 간격의 존재를 이해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그 간극을 개인으로서도 인정하고 신뢰관계를 얻을 때 비로소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함께 살려는 의지와 '모으는 마음'이 쌍방에 필요하고, 그러한 대처가 우리 대화모임의 존재 의의가 되고 있다.
*「뉴스위크」컬럼비아대학 특별강의 2018(https://www.newsweekjapan.jp/stories/world/2018/03/post-9829.php?utm_source=newsletter&utm_medium=mailmagazine&utm_campaign=20180328)
2018
그런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히기 위해 6년 전부터 일본에서도 대화의 모임 인 재팬을 네덜란드 대사관의 협조 아래 개최하고 있다.또 이곳저곳 대학이나 고등학교에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쌍방이 가진 이 전쟁의 기억의 격차를 조금이라도 메우고자 대한해의 한 방울이지만 매년 일본을 방문하고 있다.
대화 모임의 활동은 2012년부터 컨퍼런스 개최에 그치지 않고 다방면에 걸쳐 있다.그 중 하나로 나가사키의 포로수용소 터에 나가사키 시민들이 기념비를 세우는 활동이 있음을 알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그리고 나가사키 시민들이 포로 억류소 후쿠오카 제2분소에서 노동을 강요당한 모든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2015년 훌륭한 기념비를 세워줬다는 사실을 네덜란드에 소개하기 위해 비디오와 책을 출간했다.제막식에는 수용소의 생존자와 그 가족을 초청해 화해의 실현을 경험할 수 있었다.이 비에는 대화모임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무라오카 타카미츠 명예교수(라이덴대)의 권유로 '우리의 잘못을 반성하라'는 구절이 비문에 담겼다.https://www.dialoognji.org/ja/%E3%83%97%E3%83%AD%E3%82%B8%E3%82%A7%E3%82%AF%E3%83%88/
재작년(2016년) 6월에는 일본에 있던 포로수용소와 포로연구를 하고 있는 일본의 POW연구회 회원 연구자들을 초청하여 NIOD(암스테르담에 있는 국립전쟁자료관 www.niod.nl)에서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일본에서 지금까지도 이러한 연구가 꾸준히 계속되고 있음을 네덜란드에 각인시킬 수 있었다.
https://www.dialoognji.org/ja/%E6%97%A5%E6%9C%AC%E3%81%AEpow%E5%8F%8E%E5%AE%B9%E6%89%80/
Ernst de Groot(photo)
8월 15일은 일본에서는 종전기념일이지만 네덜란드 각지에서는 해방기념식이 거행된다.그중 일본인이 가장 많이 사는 암스테르담 외곽의 암스테르펜시에서 재작년(2016년) 네덜란드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인으로서 해방 기념비 앞에서 헌화를 허가받았다.함께 입회한 사람은 전쟁 중 일본 군정 하 인도네시아에서 일본 군인을 아버지로 태어난 대화모임 서기로 그는 아직도 아버지를 찾고 있다.네덜란드에는 이런 일본계 네덜란드인이 200명 정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일본계 네덜란드인에 관해서는 NHK가 2017년 훌륭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아버지를 찾아서~일본계 네덜란드인·끝나지 않는 전쟁'을 만들어 베스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상을 받았다.
https://www.dailymotion.com/video/x63rp2m
https://www.dailymotion.com/video/x63rp5g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그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네덜란드에 있다는 것을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일본인들이 알고 있을까? 화해는 결코 무지에서 나오지 않는다.우리 일본인들이 그런 것은 몰랐다는 것으로, 더구나 그 상처를 깊게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주셨으면 하는 것이 나의 일본 활동의 목표이다.
그 활동의 연장으로 중고생용으로 역사 부독본을 만들었다.나가사키시 카야키쵸의 포로 억류소 후쿠오카 제2분소를 무대로 한 네덜란드인 포로를 축으로 역사를 배운다.이 책에는 수용소 밖에 있던 향소 사람들의 당시 생활도 청취 조사해 쓰여졌으며 현재 똑같은 내용의 일본어판을 만들고 있다.수용소 터에 세워진 중학교 초 나가사키의 학교에 배포할 예정인데, 이 또한 상당히 독특한 활동이라고 자부하고 있다.이 프로젝트의 듣기 조사에는 이 향소중 학생들도 참여해 도움을 줬다.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전쟁 중 일란관계를 말할 때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필요가 있다.앞서 언급했지만 2012년 일란대화모임은 이름을 일본-오랜더 인도네시아 대화모임으로 변경했다.그것은 2011년 대화 모임에서 인도네시아 참석자들의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다.전쟁 전 식민지 통치와 전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의 관계에도 화해와 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있기 때문이었다.
2차대전 종전 후 인도네시아는 독립선언은 했지만 정권의 진공상태가 일어나 많은 민중이 폭도화해 옛 종주국인 네덜란드계 사람들을 학살하려 했다.그 폭도로부터 수용소 사람들을 지키라는 지시를 받은 것은 옛 일본군이었고, 그곳에서 목숨을 잃은 일본병도 많이 있었다.그 일은, 지금도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지만, 이 시기를 벨시업이라고 부르고 있다.일본병 중에는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네덜란드군과 싸운 병사도 많이 있었다.
이후 네덜란드가 종주국으로 다시 정권을 되찾기 위해 본국에서 두 차례 파병을 했다.이를 얼마 전까지 네덜란드에서는 경찰 행동이라고 불렀다.즉 자국의 정정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었다.또 국제적으로 인도네시아의 독립기념일은 독립선언이 만난 1945년 8월 17일로 추정되지만 네덜란드가 독립을 인정한 때가 1949년이어서 아직도 학교에서는 독립이 1949년이라고 가르치고 있다.그러나 2005년 8월 15일 일란전쟁 희생자를 애도하는 기념식에서 당시 외무장관 보트가 이제 인도네시아 독립을 1945년으로 인정하자는 연설을 했고, 그 길로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식에 참석했다.다만 이는 아직까지 공식적인 견해가 되지 않고 있어 시대의 흐름과 함께 지금 현재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정부에 제기되고 있다.
이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중 남편들을 학살당한 인도네시아 과부들이 네덜란드 국가를 상대로 네덜란드 법원에서 전쟁범죄 소송을 제기했고 2012년 이를 인정받아 네덜란드 정부는 그 마을에 사과를 하고 배상금을 지급받았다.지금까지 멀쩡했던 네덜란드에서 군대의 전쟁범죄가 들통나온 것이었다.그 시점에서 정부는 실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해 달라고 전문조직에 의뢰했지만 인도네시아 측이 합동조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외무장관의 관점에서 흘러가고 말았다.그러나 그 뒤를 이어 2015년 Oostindi(오스트인디) 교수가 라이덴대 주도의 KITLV(Konikrijk Instituut van Taal-Landen Volkenkunde 네덜란드 왕국 민속학 연구소·동남아 및 캐리비안학)로부터, 또 2016년 NIMH(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 국립정신보건연구소)의 역사학자 Limpach(림프프프)가 각각 란이의 전쟁 속에서 네덜란드군이 무엇을 했느냐고 언급하는 논문을 발표했다.이것은 많은 미디어에서 다루어지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이에 호응하듯 정부는 2016년 12월 "Dekolonizatie, Gewelden Ooorlog in Indonesia 45-50"(1945~50년 사이에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비식민지화, 폭력과 전쟁 www.ind45-50.org)이라는 학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족자카르타 가자마다대학과 공동으로 실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검증을 NIOD(Nederlands Instituut Oorlogs Documentatie(네덜란드 전쟁자료관·전쟁의 인종청소 및 대량학살연구소), KITLV, NIMH에 의뢰해 2021년 9월 그 연구가 마무리될 예정이다.또한 2019년에는 NIAS(Netherlands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in the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를 통해 국제 컨퍼런스가 열릴 예정이다.이는 다른 나라들의 비식민지화 전쟁의 비교와 검증이 주제인데,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지배의 흐름을 탄 일본의 한국 대만 중국의 식민지화와 그 이후의 관계를 글로벌한 시각으로 검증할 때가 기다려진다.
이밖에 인도네시아계 네덜란드인 2, 3세대가 자신들의 부모나 조부모에 대한 정부의 부당한 대우에 불복해 백페이 행태를 보이고 있다.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포로가 된 동인도군 병사나 동인도 관리들에게 지급되지 않은 급료의 청구를 축으로 하고 있다.결국 2017년 현재 생존해 있던 이들에게는 지급됐지만 유족에게는 지급되지 않아 아직까지 이 문제는 가시지 않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몇 년간 네덜란드 내에서는 과거 노예제 문제와 인종차별 문제 등 자국의 어두운 역사를 직시하려는 흐름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여기에는 당연히 원식민지에서 본국으로 귀국한 사람들의 2, 3세대가 깊이 관련되어 있다.즉 마블처럼 색채가 풍부해진 네덜란드 국민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네덜란드 역사에 명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려는 젊은 네덜란드인의 존재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전쟁 후 네덜란드 언론
독일에 점령된 네덜란드는 독일의 선전이나 반유대인이라는 내용의 제한을 받고 있었다.그러나 지하에서 반나치의 허술한 신문 등도 발행되었고, 특히 런던에서 반독 라디오 방송이 있었다.원래 저널리즘과 정치는 어떤 의미에서 주종관계에 있었고 정치인과 언론인은 동류로 간주되었다.
전후에는 그 반성에서 위정자에서 독립된 보도로 이행했고, 전시 중에는 불법이었던 언론사가 주류가 됐다.보다 객관적으로 사물을 전달하고 정부에 대한 반대 의견이 많아졌다.그러나 40여 년 전의 미디어는 전술한 바와 같이 독일과 일본에 관해서는 무엇이든 있으며, 독일인을 모프, 일본인을 야프라고 하는 멸칭을 지금도 볼 수 있다.당시 동인도 돌아오는 만담 엔터테이너가 하는 일본인을 야유하는 이야기에 배꼽을 잡고 웃고 있는 네덜란드인을 보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지금도 얍 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네덜란드에서의 화해
그렇다면 도대체 네덜란드에서 이 화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일반 일본인들에게는 그다지 생소한 성경을 빼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기독교에서 신과 사람의 관계가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나날의 죄를 자각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때문에 용서를 받는 기본 패턴이 있기 때문이다.입으로 고백하고 의롭다는 것을 거듭 가르쳐오고 있기 때문이다.이는 유명한 독일 바이츠제커 박사의 연설의 저류를 이룬다.
또 대화모임에 참가하는 대부분의 네덜란드인은 옛 란인에서 온 인양자들과 그 가족이지만 이들은 네덜란드 안에서는 소수민족에 불과하다.그래서 아직도 네덜란드의 공식 전쟁해방기념일은 독일에서 해방된 5월 4일이다.이런 일은 란지시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씁쓸함을 안겨주고 있다.그들은 왜 자신들이 이 나라에 있는지를 모든 국민이 알기를 바라며 그들과 화해를 원한다.대부분의 네덜란드인들에게 전쟁은 독일과의 전쟁과 그 뒤를 이은 굶주림이었다.단 사흘 만에 독일에 병합돼 버린 작은 나라 네덜란드에서 나치에 뇌동한 사람들도 많았다.또 네덜란드에서 나치 수용소로 이송돼 살해된 유대인이 가장 많았던 것이나 안네의 일기로도 유명해졌지만 네덜란드인 밀고자도 많았다.방금(2018년 12월) 네덜란드 국철이 2차대전 중 유대계 주민들을 수용소로 보내는 일에서 폭리를 취했다며 사과를 하고 배상금을 준다는 소식이 들어왔다.즉, 본가 오모토의 네덜란드인들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 결판을 짓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느리지만 자국의 과거 고름을 빼내야 직성이 풀리는 국민성이 현대 네덜란드 사회에 나타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있다.그 근저에 흐르고 있는 것은, 역시 「입으로 고백해 의로 여겨진다」임에 틀림없다.
이민자에게도, 노예의 후예에게도, 백인에게도 흑인에게도 그 중간의 어떤 색깔의 인종에게도, 그들에게 공유할 수 있는 '의'(정의)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거기에 부러움마저 든다.이런 의를 잃은 나라에는 어떤 화해도 성립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일란이 대화모임(日蘭イ対話の会) 이야기로 돌아가지만, 우리는 화해라는 것이 단순히 개인의 일시적인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야 할 것이며, 다음 세대로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리고 당사자가 함께 일하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하나의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진행하거나 초중학교 교육면에서 더욱 기여해 나갔으면 한다.전쟁 체험의 계승은 중요하지만 무엇을 계승하느냐가 더 중요하다.증오를 증폭시키는 일을 배제하면서 가능한 한 상대적인 시야를 부여하고 전쟁악을 계속 호소하는 것이야말로 평화의 초석이라고 믿는 대화모임의 사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