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기억 관련 에세이・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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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 가즈히코 「역사 인식 문제의 이정표로서의 아베 담화」

역사 인식 문제는, 아직도 중일간의 해결하지 못한 대립 사항으로서 남아있다.  

 

36년간의 일본 제국에 의한 병합의 역사와, 청일 전쟁·만주 사변·일지사변으로 이어지는 일본군의 침략의 기억은, 한국·중국 양국에 사라지기 어려운 ‘피해’의 기억을 새겨 넣은 것은  순수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가해’의 역사를 가지는 일본측에 있어서도, 패전후 70년 동안 정부로서도 국민으로서도 이 문제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에 대해 열심히, 그리고 계속 생각하고 발언해 온 역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인식 문제는 지금, 과거 최악의 수준에서 일본과 중국·한국과의 사이의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  

 

본고는 먼저 일본 측의 역사 인식의 변천을 개괄하고, 그 다음에 그 가운데에 있어서의 2015년 아베 담화의 위치 부여를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와의 비교속에서 고찰하고 앞으로 일본으로서의 역사 인식 문제에의 대응을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약간의 감상을 첨부해서 맺으려고 한다. 

 

전후 일본의 역사 인식 계보  

 

패전후 일본에서는, ①패전부터 점령, 그리고 도쿄 재판에서의 유죄판결과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11조의 판결의 수락, ② 그 후, 전전의 일본의 명예를 재구축하려고 하는 ‘우파’와 아시아에 대한 가해의 역사를 재검토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좌파’사이에서 민족의 혼의 존엄을 추구하는 치열한 논의가 일어나고 ③1995년의 내각총리대신담화 (소위 「무라야마 담화))에 있어서 하여간 하나의 공통된 결론을 달성하고 있다. 국내정치의 관점에서 말하면 무라야마 담화는 사회당 총리대신과 대부분은 자민당 의원에 의한 각료라고 하는 이례적인 조합 속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렇기때문에 무라야마 담화는 ‘우파’와 ‘좌파’의 공통 의견으로서 일본의 역사 인식 문제의 중요한 기반을 구축한 것이다.  

 

1995년에서 2015년까지의 20년간, 역사화해를 주제로 하는 일본정부와 관련된 나라들, 즉 중국·한국·북한·영국·네덜란드·미국에 대한 모든 발언에 있어서, 무라야마 담화는 그 골격을 이루었다. 이 기간 외무성에서 역사 인식 문제와 관련왼 일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외무성이 무라야마 담화를 무시하지 못하는 일은 숙지하고 있을 것이다 [i].  

 

나자신도 무라야마 담화가 나온 1995년8월, 주 러시아 대사관차석공사로서 근무하고 있었다. ‘식민지주의’와 ‘침략’을 키워드로, “통절한 반성과 마음속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 담화를 한번 읽고, “이것은 용기 있는 것이며, 앞으로는 러시아가 일본에 용기를 내보이는 차례다”는 취지의 투고를 당시 모스크바에서 잘 팔리고 있었던 주간지에 실었다.  

 

2002년 외무성 퇴관 후 역사 인식 문제를 정면에서 생각하게 되고 나서는, 일본이 국민으로서의 역사 인식을 형성해 가는 것에 즈음하여 이 담화가 소유하는 중요성에 착안하고, 1985년의 바이츠제커 연설과 이에 비견하는 이 담화의 의미에 대해서, 일본어와 영어로 출판하는 기회도 얻었다 [ii] 

 

무라야마 담화와 아베 담화  

 

그런만큼 2015년 종전 70주년을 기해서 발표되는 것이 된 아베 담화가 어떤 내용이 될지는, 대단한 관심을 가져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베 총리는 지금까지 무라야마 담화이후 ‘침략’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향을 공적으로 비판한 적도 있었고, 담화 발표가 가까워짐에 따라 역대내각의 입장을 “전체로서 이어받는다”고 말하면서, 그럼 그중에서 무엇을 이어받지 않는 것인가, 이어받는 것인가는 점이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iii].  

 

그렇게 담화 발표를 자택 텔레비전을 통해서 주시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담화는 무라야마 담화의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되는 가해자로서의 역사의 직시와